제5절 연맹왕국시대의 문화 : 법률
연맹왕국시대의 법률은 사회의 기본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률로서 만족하였고 그리하여 법률은 단순하고 엄격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선(善)이라 하고, 사회의 질서를 흐트리는 것을 악(惡)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선과 악은 곧 신의 뜻이라고 여겨 종교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여 종교적 제의를 거행할 때 단죄를 하였다.
우선 고조선시대에는 ‘팔조금법’•‘금법팔조’가 통용되고 있었다고 하는데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에는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8조의 교법(敎法)을 만들어 인민을 교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른바 낙랑조선(樂浪朝鮮)의 범금8조(犯禁八條)라는 것은 조선 본래의 법금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것은 8조의 교(敎)가 아니라 그 자체가 법금•금약(禁約)의 성격을 띠고 있다.
8조법금의 전문은 전하지 않고 3개 조만이 ≪한서≫ 지리지에 전한다. 즉,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②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1인당 50만 전(錢)을 내야 한다는 것 등이다. ①은 생명에 관한 것, ②는 신체에 관한 것, ③은 재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절도죄의 법금에서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③의 항목은 지나치게 가혹해 8조 본래의 항목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고조선 사회에서 화폐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50만 전은 중국 한나라 때의 사형수에 대한 속전법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항목은 군현시대에 이르러 새로 추가된 것이거나 개정된 항목일 것이다.
≪한서≫에는 8조법금에 이어 “이로써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호(門戶)를 닫지 않았다. 부인은 정신(貞信)하고 음란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부인은 정신하고 음란하지 않았다는 것은 8조 중에 금간(禁姦)을 내용으로 하는 1조가 들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여에서는 다음과 같은 4조목의 법률이 있었다고 한다
1.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2. 절도를 한자는 12배의 배상을 한다.
3. 간음을 한자는 사형에 처한다.
4. 부인의 투기를 특히 미워하여 이를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서울 남쪽 산에 버려서 썩게 한다. 단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 가려고 하면 우마(牛馬)를 바쳐야 한다.
이와 같이 고조선과 부여의 법률에는 공통되는 조목이 많이 있다. 또 그 법률 조목이 간단하게 전해오는 고구려와 삼한 및 옥저 동예에서도 이 두나라와 마찬가지의 법조목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시대에는 살인, 상해, 절도, 간음, 투기의 다섯가지 죄목에 대한 법률이 존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법조목은 이 시대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곡물을 화폐와 같이 교환의 표준으로 삼고, 계급 분화로 노예를 사유 재산시하던 시대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살인과 상해에 대한 처벌은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중시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절도에 대한 처벌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존중하였다는 사실은 말해 주고 있으며 특히 고조선에서는 절도죄에 대하여 엄격하여 비록 속전을 내었다 하더라도 이를 부끄러이 여겨 결혼의 상대를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음과 투기에 대한 처벌은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보호하고자 한 것으로 부여에서는 가족제도에 관한 규정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투기죄에 대한 가혹한 규정은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일반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단순하고 엄격하게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사회상의 변천에 따라 차츰 조목이 늘고 복잡하게 변해가는데, ≪한서≫ 지리지에는 한나라의 관리•상인 들이 처음에 낙랑에 와서 토착 조선인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있음을 보고 도둑질을 했기 때문에 풍속이 점차 나빠져, 이 역사서가 저술되던 시대에는 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