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패, 전패, 위패
위 용어가 문화재청 문화재정보 설명에서 모두 등장 합니다.
전주객사는 위패로 다른 객사는 전패 혹은 궐패로 안내되어있습니다.
전주객사의 위패는 틀린 것으로 봐야 합니다. 문화재청 정보의 오류입니다.
참고로 사전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궐패[闕牌]
조선시대 대궐에 위패(位牌)와 같이 모셔 두었던 '궐'(闕)자를 새긴 나무패.
중국 황제의 위(位)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궐자패(闕字牌)라고도 한다. 또한 지방 고을에서는 서울의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가 있어 이를 전패(殿牌)라고 하였으며, 일명 궐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대궐의 정전(正殿)에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를 두고, 각 고을의 객사에는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었다. 설날, 동지, 황제나 임금의 탄생일 등에 황제에게는 임금이, 임금에게는 외관(外官:지방관리)이 인사하는 뜻으로 이에 배례했다.
전패[殿牌]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전(殿)’자를 새겨 세운 나무 패.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리 전부가 모여 배례(拜禮)하고 또 지방에 출장한 관은 이에 대하여 배례하였으며 만일 훼손, 모독하면 불경(不敬)으로 처리되어 본인은 물론 수령(守令)과 그 고을까지 처벌당하였다.
위패[位牌]
돌아간 이의 영혼이 안정할 수 있도록 자리를 베푼 나무패를 말하며 신주(神主)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우제의 신주는 뽕나무로 만들고, 연제를 지내고 난 뒤에 밤나무로 만들었다가 점차 밤나무 하나로만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밤나무의 경우 닭소리나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의 밤나무로, 옹이가 없고 결이 좋은 것으로 만든다고 한다. 밤나무가 없으면 견고한 재질의 나무를 쓴다. 전통에 따라 장례 기간 안에 만들어 두었다가 매장을 마치고 난 뒤에 제주(題主:돌아간 이의 이름을 신주에 씀)를 하여 사당에 모신다.
조선시대의 객사건축
조선시대의 읍치는 대부분 배후에 진산(鎭山)을 두고 앞에는 하천이 흐르는 풍수지리상의 요지에 입지하므로 북문을 내지 않고 동서문과 남문만을 둠으로써 내부 가로구조가 T자형을 이루는 것이 보통인데 두 도로가 교차하는 중심부에 객사(客舍)와 관아(官衙)가 자리하며 그 중에서도 객사가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다.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임금에 대한 예를 행하는 장소로서 지방의 공공건물 가운데 가장 높은 위계를 갖는다. 수령들은 부임하게 되면 먼저 객사에 들려 배례를 올렸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나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통해 임금에 대한 충성과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짐하였다. 객사는 외국에서 온 사신들과 공무를 위해 파견된 중앙 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하거나 고을의 인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는 곳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대표적인 객사 건물로는 경기도 과천객사와 평택객사, 충청도 문의객사와 부여객사, 전라도 무장객사와 낙안객사, 경상도 거제객사와 청도객사 등이 있고 최근 상주 고창 등에서 객사를 복원하였다. 이 건물들은 모두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 객사의 건축형식이 표준화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옆으로 긴 한일자(ㅡ)형을 이루는 객사 건물은 전패나 궐패를 모신 정청(正廳)과 숙소로 쓰는 익사(翼舍)로 구성되는데, 정청을 중앙에 두고 그 좌우에 익사를 나란히 배열하며, 정청 지붕을 익사 지붕보다 한단 높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익사에는 대청마루와 온돌방을 마련하고 동익사에는 문관(文官)을 서익사에는 무관(武官)을 머물게 하였다. 대개 서익사 보다 동익사를 격이 높은 것으로 여겨 여기서 주로 연회 등을 열었기 때문에 동익사 주변에 연못을 마련하거나 주변에 수목을 조성해서 좋은 경관을 꾸미기도 하였다.
사전에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어 그대로 옮겼습니다.
사전의 설명대로 객사는 지방의 공공건물 가운데 가장 높은 위계를 과시합니다. 고을수령의 집무실인 동헌보다도 객사는 규모가 큽니다. 서산 해미의 경우는 현재 객사보다 동헌이 더 크게 복원되었는데 이는 잘못 복원한 대표적이 예입니다. 기본적으로 동헌은 객사보다 큰 규모 일수는 없습니다. 홍성의 경우 홍주동헌은 22칸 객사는 43칸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하네요.
덤으로 전패의 변 이란게 있습니다.
고을에 탐관오리가 득세할 경우 백성들은 그 수령을 몰아내기 위해 임금의 상징인 전패를 훔쳐가게 되면 그 고을 수령은 죄를 묻지는 않고 전근 가게 되며 그 고을 또한 강등 됩니다. 한 예로 전패의 변으로 현종 2년(1661)에는 홍주목이 홍양현으로 강등되고 현종3년(1662)에는 공주목이 공산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 충홍도(忠洪道)라는 도명이 충공도(忠公道)로 다시 충청도(忠淸道)로 2년 사이에 도명이 2번이나 바뀌게 됩니다.
현재 충남에서 남아있는 객사는 부여 홍산객사(鴻山客舍 : 충남유형문화재 제97호), 서산 서산객사(瑞山客舍 : 충남유형문화재 제137호) 2곳이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