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연맹왕국의 사회와 정치

제4절 연맹왕국의 사회와 정치

1. 촌락과 농민

촌락은 단일한 농경촌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지에 연결되는 다수의 취락군(聚落群)으로서 1천호 미만의 인구를 가지고 동일한 시조를 내세우는 의제적 혈연집단(擬制的血緣集團)으로서 독립된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는 개별정치집단이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농업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밭에서 잡곡을 재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논에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벼농사는 특히 삼한에서 성하였으며 이를 위해 수리를 위한 저수지가 이미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업이 당시의 주된 산업이었음은 부여에서 흉년이 들면 왕이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가거나 죽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또 5월에 씨를 뿌리고 난 뒤의 기풍제와 10월에 추수가 끝난 뒤의 추수감사제가 가장 큰 축제였다는 사실도 농업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물론 농업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제활동을 하였다. 가령 부여에서는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때에 축제를 거행함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했다. 목축이 크게 유행하고 있어서 관직명에는 소, 말, 돼지, 개 등의 가축이름이 붙여질 정도였다.

남쪽 삼한에서도 소와 말이 가축으로 길려졌으며 그 뼈가 김해패총에서도 발견되었다. 또 삼한에서는 꼬리가 긴 닭이 있었다고 하며 양잠을 하여 견포를 직조하였다. 한편 사냥도 널리 행해졌는데 고구려와 같이 산간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는 특히 그러하였다. 김해패총에서 멧돼지, 사슴 등 동물의 뼈가 나온다거나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에서 이와 같은 동물의 그림이 발견되는 것도 사냥을 중요시한 증거가 된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나 그 밖의 물고기 그림도 나오며 따라서 해안지역에서는 고기잡이도 했음을 말해준다.

동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옥저나 동예 같은 나라에서 고기잡이가 특히 중요시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시대의 주산업은 농업이었다. 그리고 촌락은 농업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농업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수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촌락민은 농경 등의 일상생활을 호민의 주재 하에서 영위하고 통제를 받았다.

부여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위나라 사람이 보았을 때, 가난하고 열세한 촌락민의 외형상의 모습이 호민의 소작농이나 노복처럼 보여졌으나 부여의 하호는 노예나 농노가 아니라 읍락의 일반민이었고, 호민은 읍락의 거수(渠帥)였다.

당시의 촌락에는 촌락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호민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요소를 활용함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나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촌락민들도 전래의 관습과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에 의지해 그들의 삶을 유지해나갔던 상황으로 여겨진다.

읍락민은 모두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촌락민이 호민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들 내에서도 자영농민층과 빈농층의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전쟁 때에는 스스로 무장해 참전했던 이들과 그렇지 못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부대로 참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농민의 개인적인 토지 사유는 이미 생겨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촌락의 주된 구성인인 이들 양인농민은 촌락의 공유지를 경작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촌락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촌락민의 집회소와 같은 큰 거주지의 존재라든가 삼한에서 미성년집회나 공동 노동의 모습을 전한다고 생각되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들에서 추측된다.

군장국가 내지 연맹왕국시대의 사회는 이 농민들의 거주지인 촌락을 기반으로 하고 그 위에 서 있었다.

2. 군장국가의 구조

촌락민을 지배하는 것은 군장국가의 지배자였다. 군장국가의 지배자는 원래 촌락민과 동등한 촌락의 구성원이었지만 이들은 촌락의 지배자로 성장한 것이다.  비록 이들 위에 자리잡은 왕권이 성장했다 하더라도 이 시대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은 이들 군장국가의 지배자였다.

이들 군장국가의 지배자로 추정되는 것으로는 고구려지역의 연맹체 기본단위인 나(那)의 지배자들, 부여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들, 삼한의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들이 있다.

현토군을 몰아낸 뒤 고구려 지역은 고구려왕을 대표로 하는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맹체 구성의 기본 단위는 나(那)였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나’들은 서기전 2세기 말에는 그들간에 완만한 연맹체를 형성했으며, 그 무렵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였다.

서기전 107년에는 한나라의 지배에 들어가 있다가 한군현의 직접적인 지배에 저항해 이를 물리친 뒤, 서기전 75년 이후 다시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뒤 연맹체 내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소노집단(消奴集團)이 우세했다가 뒤에 계루집단(桂婁集團)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부여에서 이주해 온 집단의 대표인 주몽(朱蒙)과 혼강 상류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松讓王) 사이에 벌어진 투쟁을 전하는 설화는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계루부의 흥기는 늦어도 서기전 2세기 이래 압록강 중류 지역 일대에서 진행된 ‘나’집단들의 성장과 정치적 움직임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송양집단에서 주몽집단으로의 교체, 즉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는 어디까지나 연맹체장의 교체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계루집단이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 이후에도 고구려족 전체를 통합하는 강력한 국가조직은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체적 유제와 ‘나’집단들간의 갈등, 그 틈을 이용해 들어오는 한군현의 힘에 의해 상당 기간 저지되었다.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짙게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준다.

아직도 부자상속의 관행이 확고히 정립되지 못했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깊히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 요소는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견사(犬使)·견사자(犬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 가(加)는 수장(首長)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들이 각기의 읍락들을 통솔하였다. 대가(大加)는 수천호를, 소가(小加)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가들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참전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로서 군림했으나, 초월적인 권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삼한 소국은 다수 읍락을 포괄하는 지연집단(地緣集團)으로서,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국읍의 주수(主帥)는 읍락 거수(渠帥)가 개별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군사책임자이다. 유사시에 장악된 군대통솔권이 일상적인 것으로 확보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지배권력의 발전과정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대외적으로 각 소국은 국읍을 주축으로 획일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개별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이 밖에 국읍세력이 행사하고 있었던 다른 하나의 기능은 제천의식(祭天儀式)의 주관이다. 국읍에는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祭祀長)을 세워 매년 5월과 10월 곡식의 파종과 추수가 끝날 때마다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청동기시대 이래 토착사회에서 전래되어오던 원시농경의례로서 천군은 전통적인 지배권의 일부를 계승하는 토착적인 성격이 강한 지배자이다.

삼한사회의 국읍은 초읍락적인 제천의식의 주관을 통해 읍락간의 유대의식을 높이고, 다수의 읍락들을 통합하는 내재적인 결속원리를 가졌다. 이처럼 삼한 소국은 제정이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정치·경제적인 권력 못지 않게 종교적인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이러한 상태는 국읍의 정치권력이 미약한 초기단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이후 정치적 지배기능을 우선적으로 행사하는 새로운 성격의 지배자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서기전 1세기 이후에는 철기문화의 유입과 유이민의 이주라는 정치·문화적인 영향으로 이러한 성격의 지배자가 수적으로 크게 증가되고, 그들의 정치·사회적 비중이 증대되면서 삼한사회의 주도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3. 왕권의 성장

여러 군장국가의 연맹에 의해 이룩된 연맹국가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발전에 차이가 있어서 한결같지는 않았다.  특히 한군현은 이들 군장국가와 개별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이들의 통일을 방해하는 분열정책을 써서 이들의 정치적 성장을 방해하였다.

부여나 고구려의 정치조직은 매우 앞선 것이었다. 처음에는 왕이 선거에 의해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경우 흉년이 들면 그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거나 교체하였다는 사실, 또 고구려에서 후대에 수상직인 대대로를 선거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왕실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에서 처음에 소노집단(消奴集團)이 우세했다가 뒤에 계루집단(桂婁集團)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는 것이 구체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왕실의 교체현상은 신라가 연맹왕국의 상태에 머물고 있을 때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왕위가 형제상속의 원칙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뒤에 점점 왕실은 고정되어 갔으며, 또 왕위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세습되기에 이르렀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依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다. 특히, 마여가 죽은 뒤 아들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태조왕대 이후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추세는 각 부의 자치력과 상위권력인 중앙정부의 집권력과의 상관관계에서 설정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부의 자치권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각 부의 자치권은 중앙정부에 의해, 초기에는 대외적인 외교·군사·무역권 등이, 이어 점차적으로 왕권이 개입해 각 부의 관원의 위계를 올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중앙정부가 발탁해 임용하기도 해, 중앙정부의 관계조직 체계에다가 각 부의 크고 작은 족장(加)들과 여타의 관원들을 연계시켜 부의 독자성을 해체시켜 나갔다.

왕권의 통제력이 강화됨에 따라 각 부의 자치력이 약화되어갔고, 그에 함께 각 부의 일부 유력자들은 중앙정부와 연결해 그에 소속되어 점차 중앙귀족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부응해 수도 지역을 구획한 행정단위로서 동,서,남,북,중부(部)를 설치해, 계루부인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각급 족장 출신들을 소속시켰다.

구체적으로 부의 명칭은 신대왕 이전에는 고유한 명칭의 부만 보였지만, 고국천왕대부터는 방위로 표현된 부가 등장했으며, 서천왕대 이후부터는 방위명(方位名) 부만이 보이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중앙정부와 각 부 사이의 집권력과 자치력의 상관관계에서 집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개략적인 추세를 나타낸다. 이와같이 부여의 후기나 고구려의 초기에 대가가 사회적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연맹왕국의 조직은 크게 변형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왕권이 강회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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