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절 연맹왕국의 형성 1. 부여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의 국가로서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부여국의 중심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이동 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북류 송화강과 눈강(嫩江)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肇源)의 백금보(白今寶)문화나 대안(大安)의 한서(漢書)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성이 부족하다.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長春)·농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扶餘府)인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黃龍府)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金代)에 융안부(隆安府)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황금의 명산지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完顔部)의 발흥지인 아성(阿城)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창도(昌圖) 북쪽의 사면성(四面城) 지역으로 보는 설, 북류 송화강 하류의 오늘날의 부여(扶餘)로 추정하는 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이들 지역에서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산성이 있고 한대(漢代)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부여국의 중심지로 비정하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나아가 길림시 지역이 부여국의 초기 중심지였고, 농안 부근은 후기 중심지였다고 여기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選任)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짙게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준다. 그 뒤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依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다. 특히, 마여가 죽은 뒤 아들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자상속의 관행이 확고히 정립되지 못했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깊히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 요소는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견사(犬使)·견사자(犬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 가(加)는 수장(首長)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들이 각기의 읍락들을 통솔하였다. 대가(大加)는 수천호를, 소가(小加)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가들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참전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로서 군림했으나, 초월적인 권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의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의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제압하는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20년 위구태(尉仇台)는 부여왕자로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漢)나라를 방문했고, 한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또한 위구태는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公孫度)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 한편, 부여는 동으로 읍루족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220년대 초 읍루가 떨어져나가자 몇 번 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끝내 평정하지 못하였다.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직도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지방 각지에서 읍락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加)들의 자치력이 강하던 상황에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어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특히, 3세기 종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해졌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고, 부여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의라(衣羅)가 왕위를 계승한 뒤 진(晉)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그대로 머물어 토착하였다. 길림 방면의 부여는 그 뒤 계속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많은 수의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당시 부여는 진나라가 쇠망함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더 이상 길림 일대의 원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346년 서로부터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할하였다. 부여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북옥저 방면에 정착했던 부여인들은 본국과 분리되어 점차 자립하게 되었다. 이를 고구려인들이 동부여라고 했고, 길림 및 장춘·농안 방면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동부여는 410년 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물길(勿吉)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松花江)을 거슬러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왕실은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여지역의 통제를 위해 존속시켰던 부여왕실의 명맥은 그 지역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2. 고구려의 등장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7년에 주몽이 이끈의 부여의 일파가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자리잡고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방에는 B.C 4세기 경에 고구려의 선구적인 세력이 결집되고 있었다. 예맥이라고 불리던 것이 바로 이러한 세력이다.
환인 집안 일대에 서기전 3세기 무렵 이후부터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외부와의 교역은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집단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그에 따라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마을의 규모도 커지고 그들 상호간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정치적인 움직임이 태동하였다. 씨족간의, 그리고 씨족 내 친족집단들간의 우열이 현저해졌다. 나아가 유력한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일정한 계곡이나 하천 유역의 촌락들을 규합하는 지역 정치집단이 형성되어 갔다. 야철지(冶鐵址)와 온돌시설을 갖춘 집자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쇠도끼 등의 철제품이 출토된 서기전 4∼3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시중군 노남리 남파동 제2기층과 토성리 제3기층과 같은 문화유적을 남긴 이들은 지역집단의 모체가 되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 집단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나(那)’였다. ‘나(那)’는 내가〔川邊〕나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집단으로서, 부족이나 일부 국가 형성과정에 있던 시원적인 국가 같은 소국(小國)으로 파악된다. ‘나’집단은 주위의 작은 집단을 흡수해 세력을 확대했으며, 서로간의 연계를 모색해 나갔는데 그 무렵 외부로부터 자극과 압박이 가해져 왔다. 중국세의 동점(東漸)과 특히 서기전 2세기의 위만조선의 팽창에 따른 압박은 압록강 중류 유역의 나집단들간의 상호연합을 촉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128년 한나라에 투항한 예군(濊君) 남려(南閭) 휘하 28만 명의 집단은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이 28만 명의 집단은 강력한 조직과 결속력을 지닌 국가라기보다 각 지역의 부족과 소국들을 연결한 완만한 연맹체적인 성격의 집단으로 여겨진다. 더 이상의 통합이 진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漢)나라의 동방 침략에 따라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은 여기에 창해군을 두었으나 (B.C 128) 지도상의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그후 현토군의 설치에 따라 압록강 유역은 한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때 중국인과 토착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런데 낙랑군 지역에서는 중국 방면의 유이민과 토착민으로 이루어져 연합정권의 성격을 가진 위만조선 때와는 달리, 토착민과 한인(漢人)이 뚜렷이 구별되어 민족적 이중구조하에서 지배와 피지배 관계 나타났다. 또한 종래의 8조의 금법이 군현제가 실시되어짐에 따라 급속히 60여 조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급격한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법의 급격한 증가는 토착사회에 의해 선진 중국의 문물이 수용됨에 따라 일어나는 자기사회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는 아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고도로 사회분화가 이루어졌고, 산업이 발달했던 한대의 문물과 조직이 상대적으로 소박한 단계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지녔던 동방사회를 무력으로 침공해 일방적으로 강요됨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곧 이는 토착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문화가 급속도로 와해되고 혼란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이에 따라 기존 토착사회의 정치적인 상급 통합조직은 분해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상인과 관리가 진출함에 따라 그들의 도둑질로 인심이 각박해졌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군현의 공적인 수취 외에도 개인간의 거래관계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한인이 수탈적으로 상행위를 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토군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유사한 상황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 한군현의 지배는 곧 고구려족의 반발을 유도했고, 이는 군현의 폐합과 퇴축으로 나타났는데, 현토군의 경우 서기전 75년, 중심지가 흥경·노성 방면으로 옮겨졌다. 현토군을 몰아낸 뒤 고구려 지역은 고구려왕을 대표로 하는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맹체 구성의 기본 단위는 나(那)였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나’들은 서기전 2세기 말에는 그들간에 완만한 연맹체를 형성했으며, 그 무렵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였다. 서기전 107년에는 한나라의 지배에 들어가 있다가 한군현의 직접적인 지배에 저항해 이를 물리친 뒤, 서기전 75년 이후 다시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뒤 연맹체 내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소노집단(消奴集團)이 우세했다가 뒤에 계루집단(桂婁集團)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부여에서 이주해 온 집단의 대표인 주몽(朱蒙)과 혼강 상류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松讓王) 사이에 벌어진 투쟁을 전하는 설화는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송양은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소노집단의 장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계루집단의 기원에 대해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문〉 등에서 전하는 걸 보면 이 집단은 북부여(北扶餘)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런데 길림을 중심으로 하는 부여의 묘제는 석관묘와 토광묘였는데, 이에 반해 압록강 중류 지역의 묘제는 적석총이어서,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와 부여의 묘제가 상이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해 보면 만약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 온 집단에 의한 정복으로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면 마땅히 석관묘나 토광묘가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 사실은 주몽집단이 (북)부여에서 이주해 왔다는 설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말한다. 주몽설화는 허구이며 4세기 이후 고구려 왕실이 건국 전승을 만들면서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 즉 한 갈래라는 고구려의 옛 전승이 있음을 기술하였다. 이는 곧 3세기 초 이전부터 주몽설화와 같은 부류의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5세기 후반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집단이 대두한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이주와 급속한 정복보다 선주민 집단과 융합하면서 서서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부여의 묘제인 석관묘나 토광묘가 확인되지 않는 이유로 보인다. 즉 계루집단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주해 기존의 ‘나’집단들과 큰 단절이 없이 상호 융합되어 갔고, 이어 기원 전후 무렵 연맹체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의 군장이 ‘추(鄒)’였다고 중국측 기록에서 전해지는데, 이 사람이 주몽이었던 것 같다. 주몽설화는 서서히 진행되었던 계루부 왕실의 대두과정을 뒷날 압축해 주몽 당대에 모두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설화화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계루부 왕실의 흥기는 늦어도 서기전 2세기 이래 압록강 중류 지역 일대에서 진행된 ‘나’집단들의 성장과 정치적 움직임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송양집단에서 주몽집단으로의 교체, 즉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는 어디까지나 연맹체장의 교체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계루집단이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 이후에도 고구려족 전체를 통합하는 강력한 국가조직은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체적 유제와 ‘나’집단들간의 갈등, 그 틈을 이용해 들어오는 한군현의 힘에 의해 상당 기간 저지되었다. 서기전 75년 이후 한은 고구려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를 다시 도모하면 전체 고구려족의 공동전선이 형성될까 봐 간접적으로 통제하였다. 한군현은 때로는 물자나 작위(爵位)를 주고 때로는 직접적인 무력침공을 해 고구려의 내적 통합력의 성숙을 저지하고, 각 집단별로 개별적인 관계를 맺어 분열,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현토군의 퇴축 이후에도 상당 기간 중국 군현의 영향력이 고구려 사회에 미쳤다. 서기 10년경 북방 유목종족을 공격하기 위해 왕망(王莽)이 내키지 않아하는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했던 사실은 중국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서기 47년 1만여 명을 이끈 잠지락(蠶支落)의 족장 대승(戴升)이 낙랑군에 투항한 사례는 한군현의 분열정책에 따라 고구려 연맹체 내부에서 일어난 원심 분리현상의 한 예이다. 이어 1세기 후반 모본왕이 피살되는 등 고구려 내부에서는 장기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던 같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고구려 사회 내에서는 한편으로는 외세의 작용력을 극복하고 한편으로는 ‘나’집단간의 통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대체로 1세기 종반 2세기 초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포괄하는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고대국가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대내적으로는 그간 진행되어 온 ‘나’집단들 상호간의 통합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나’집단들은 유력한 ‘나’를 중심으로 서로 병탄해 나가면서, 보다 큰 단위세력을 형성해 갔다. 계루집단에 의한 조나(藻那)·주나(朱那) 및 개마국의 병탄이나 1만여 명의 부여계 집단이 연나(椽那)로 합병된 사실들은 그러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들 다수의 ‘나’들은 점차 다섯 개의 유력한 ‘나’로 통합되고, 다섯의 ‘나’가 계루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고구려왕을 정점으로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아래 귀속되어졌다. 이에 고구려의 5부가 확립되었다. 각 부(部)는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외교권 및 전쟁권은 박탈당하였다. 나아가 각 부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각 부내의 동향까지 왕실에서 통제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는 곧 중국 군현의 분열·회유책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한군현의 간접적인 영향력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나아가 태조왕 때부터 왕의 지휘하에 중국 군현에 대한 조직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옥저 방면 등에 대한 정복활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1세기 후반의 정치적 혼란상태를 극복하고 태조왕이 강력한 집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계루집단 내에서도 각 친족집단들간에 격렬한 상쟁이 있었던 것 같다. 태조왕 이전의 고구려왕들의 성은 해씨(解氏)였는 데 비해, 태조왕 이후에는 고씨(高氏)라 칭하였다. 태조왕과 이전의 모본왕(慕本王)이 사촌간이라고 했지만, 태조왕의 재위기간이나 수명 등을 고려할 때 양자는 실제 계보상에서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태조왕계는 종전의 계루부 왕실의 방계집단이거나 또는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세력으로서, 이 때 대두해 세력을 굳힌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왕(太祖王) 또는 ‘국조왕(國祖王)’이라는 왕호를 칭한 것도 신흥세력으로서의 의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 태조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그들의 계보의식 또한 태조왕을 시조로 여겼다. 이런 태조왕계와 주몽왕계를 합쳐 주몽을 시조로 하는 일원적인 왕계를 구축한 것은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 이후였고, 그것이 〈광개토왕릉비〉에 기술된 고구려왕계이다. 그 과정에서 모본왕과 태조왕을 계보상으로 직결시키려고 한 결과 태조왕의 수명과 재위 기간이 과도하게 늘어난 것이다. 3. 진국과 삼한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서기전 3∼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성립해 있었던 정치집단. 조선(朝鮮)·진번(眞番)·임둔(臨屯) 등과 공존하였다. 진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사기≫가 판본에 따라 ‘진번방중국(辰番‘旁衆國)’, ‘진번방진국(辰番旁辰國)’ 두 계통이 있어 진국을 역사적인 실체로 인정하는 입장이 있다. 반면 진번 곁에 있는 중국(衆國), 즉 여러 나라라는 보통명사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따라서, 진국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또는 진국을 중국 중의 하나로 보는 등 그 설이 다양하다. 진국에 관해서는 ≪사기≫ 이외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과 맞지 않아 동쪽 진국으로 갔다.”는 ≪위략 魏略≫의 기록과 “진한은 옛 진국(辰韓古之辰國)”이라는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 그리고 “삼한은 모두 옛 진국(三韓皆古之辰國)”이라는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이 있다. 이들 중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진국을 한반도 남부지역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토착집단으로 규정하는 입장이 있다. 또한, 이 지역에 존립하고 있었던 여러 정치집단군 전체에 대한 범칭으로서 ‘신지(臣智)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집합명사로 이해하여, 진국을 삼한 또는 그 일부인 마한·변한의 모체로 설명하기도 한다. 한걸음 더 비약하여 진국을 삼한과 동일시하는 주장도 있다. 이와 달리 ≪삼국지≫의 자료를 취하면서 진국을 중남부 일부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특정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즉, 진국이란 요동(遼東)의 북진한(北辰韓)이 점점 남하하여 지금의 경상도에 최종 정착지를 얻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에 세운 정치집단이라는 것이다. 또, 위만(衛滿)에게 쫓겨나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자리잡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의 치소(治所)가 진국이며, 이 준왕계의 진국이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 진한의 일부를 구성했다는 해석들이 있다. ≪사기≫·≪한서≫에 의하면, 진국은 서기전 2세기 후반경에는 중국 한(漢)나라와 직접적인 통교를 희망하였으나, 위만조선이 가로막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한나라와 국제적인 교섭을 원할 정도의 집단이라면 위만조선 이전부터 최소한 한반도 서북지역과 빈번한 접촉경험이 있던 선진적인 집단이며, 소규모의 단일 정치체라기보다는 다수의 정치집단을 통할하는 조직체여야 한다. 이 시대의 문화적 선진성 여부는 일반적으로 금속제 유물의 보급도를 통해 평가된다. 그렇다면 진국은 서기전 3∼2세기경 중남부지역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의 중심지인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청동기 제작과 보급을 통해 원거리 교역을 주관하면서 일정한 범위의 정치집단들을 통할하던 정치적 구심체로 해석할 수 있다. 진국사회는 정치적인 지배자가 농경의례를 비롯한 각종 제사의식과 교역을 주관하는 동시에, 농경기술을 지도하거나 행정·군사 기능을 겸하는 제정일치사회(祭政一致社會)였다. 그리고 이 지배집단의 주된 묘제는 석관묘(石棺墓)와 석곽묘(石槨墓)·토광묘(土壙墓)였다. 경제적으로는 석제 농기구와 목제 따비·괭이를 사용해 벼와 함께 조·기장·수수 등 잡곡을 경작하는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근래에 조사된 진국시기 지배자의 대표적 분묘유적으로 충청남도 당진 소소리유적, 부여 합송리유적, 전라북도 장수 남양리유적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세형동검, 동과, 동모, 세문경과 함께 중국 전국(戰國)계 주조철제도끼, 끌 등이 부장되어 있어, 대동강 유역과 교류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지역에 비정된다. 삼한사회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삼국지 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이며, 축약, 정리된 내용이 ≪후한서 後漢書≫ 동이전과 ≪진서 晉書≫ 사이전(四夷傳) 등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마한은 54개 소국(小國),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사기 史記≫ 조선전과 ≪한서 漢書≫ 조선전에 의하면, 서기전 2세기경까지도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정치집단에 대해서는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한 소국의 활동기사가 나타나는 것은 서기 1세기 초엽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기≫의 판본이 ‘중국’ 이외 ‘진국’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래, ‘진국’ 자체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진국’과 삼한의 발전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진국’의 역사적 존재를 부인하고 ‘중국’설을 취할 경우, 삼한형성문제가 ‘진국’과 결부될 필요성은 없어진다. 그러나 진국설을 취하고, ‘진국’을 남부지역 전체의 토착집단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삼한 전체 또는 마한과 변한이 모두 ‘진국’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 ‘진국’을 남한 일부지역에 형성된 특정세력집단으로 규정하는 입장에서는 진한이 옛 ‘진국’이라는 ≪삼국지≫의 기록에 근거해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종래의 연구 중에는 마한족·진한족·변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집단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 정착해 삼한을 형성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선주토착집단의 점진적 발전 결과로 삼한이 대두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한’은 ‘크다, 높다’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의 ‘한(khan, han)’이라는 말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서, 고조선 지배씨족의 이름이 되고 이것이 다시 국명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혹은 문헌자료에 나오는 ‘진국’과 한왕(韓王)의 존재를 근거로 위씨조선(衛氏朝鮮)의 멸망을 한 형성의 시발점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이와는 달리, 한족사회 형성의 문화배경에 주목해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인돌〔支石墓〕사회가 점진적인 발전을 거쳐 서기 1세기경 소부족국가(小部族國家)를 형성해 대두하게 된 것이 ≪삼국지≫의 삼한이라는 주장이 있다. 역시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한강(漢江)유역을 경계로 남쪽지역이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이며, 이들이 ‘한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초기철기시대라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한다면, ‘한’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는 별개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토착화과정은 청동기문화단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이 지역에 성립된 정치집단인 삼한 각 소국의 형성과정, 그리고 소국연맹체의 의미를 가진 마한·진한·변한의 대두는 시기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상호 구분되어야 한다. 삼한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각 소국의 형성과정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단계의 대소규모 단위집단들이 다수 통합되어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게 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삼한사회의 70여 소국들은 일정시기에 일률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시기와 과정이 비교적 다양하다. 고고학 자료상 지배자 개인이 소유하는 금속제 유물의 수량과 구성은 정치집단의 존재와 규모, 분포상태, 문화배경을 나타내는 주요한 척도가 된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마한지역 소국의 상당부분은 서기전 3∼2세기 이래 세형동검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달리 청동기유물에 비해 철기유물이 다량 분포된 한강유역이나 경상도지역의 소국들은 서기전 1세기 이래 철기문화의 유입, 위만조선을 비롯한 북방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형성되는 것이 주로 많다. 삼한의 각 소국들은 종래 부족국가로 통칭되어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읍락국가(邑落國家)·군장사회(君長社會, chiefdom)·초기국가와 같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의 설정이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삼한사회의 기본성격을 규정하고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이를 위해 소국의 전반적 성격과 조직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지식의 축적이 요구된다. 각 소국의 존재와는 별개로 마한·진한·변한의 구분은 소국의 개별적인 성격의 차이나 전체적인 문화기반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삼한의 구분은 소국 사이에 형성된 유기적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삼국지≫의 마한과 진한의 실체가 대두되는 것은 특정 소국을 주축으로 다수 소국들 사이에 통일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정치·경제적 결속기반이 확립된 결과이다. 경제적인 교역관계를 토대로 삼한 분립의 실마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기전부터이나, 이것이 확대 발전되어 지역별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로서의 마한과 진한이 성립되는 것은 철기가 일반화되는 서기 1세기 이후 단계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