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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 1. 고조선 사회의 성장 처음 사서에 등장할 때 ‘조선’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이 때 고조선이라 한 것은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이란 명칭이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는 조선이란 한자의 뜻을 새긴 풀이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언제인가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건국 기년을 서기전 2300년대로 규정하였다. 농경과 청동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에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고, 고조선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흔히 ≪산해경 山海經≫과 ≪관자 管子≫를 들고 있다. ≪산해경≫의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 조선의 위치에 관해 “조선은 열양 동에 있고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 기록하였다. 이 기사에 의거해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의 위치를 비정하는 고찰들이 있어 왔다. 조선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사기≫와 ≪전국책 戰國策≫ 등 한(漢) 초의 사서이다. ≪사기≫ 소진전(蘇秦傳)에 의하면, 소진이 연(燕)의 문후(文侯 : 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방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만한 세력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늦어도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실체가 북중국 지역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중심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고에서 재요령성설(在遼寧省說), 이동설(移動說), 재평양설(在平壤說)이 제기된 이래, 논란이 거듭되어 오고 있다. 문헌상에 보이는 지명의 위치 비정에 다양한 설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실증상의 문제에 덧붙여 각 시대마다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커 상반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이 논란이 분분한 고조선 중심지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또한 요하 유역으로 보는 설과 평양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실물 유적으로 남아 있는, 진·한대의 만리장성의 위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의 양평(襄平)이라고 하였다. 낙랑군 조선현은 서기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중심부에 설치하였다.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 이후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기까지 위치에 변동이 없었다. 조선현의 위치도 평양지역이었으므로, 자연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앞 시기의 고조선의 수도도 이곳 평양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시종 평양 일대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우선 문헌상으로 보이는 조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에 대해 언급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전이다. 즉 연나라 문후(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소진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요 세력으로 당시 북중국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략 魏略≫의 조선에 대한 기사와 통한다. 또한 ≪위략≫에서는 조선이 연과 각축을 벌이다가, 연의 소왕(昭王 : 서기전 331∼279) 때에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000리’를 상실했다고 하였다. 이에서 ‘2000리’는 논란을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사기≫ 조선전에서도 고조선이 연에 영토를 상실당했다고 전하므로, 고조선은 이 무렵 서쪽 영토를 상실하고 연과 청천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천강 서쪽의 요동 지역은, 적어도 일부는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과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의 왕검성이었다는 점을 결부시키면, 서기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세력을 서쪽으로 뻗쳐 요동 지역을 세력하에 포괄하고 있었으며, 연과 각축을 벌였던 상당히 강한 세력이었다는 추론이 일단 가능해진다. 그런데 서북한 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은 에임부분(決入部)을 지닌 세형동검이다. 이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상한은 서기전 3세기로 여기거나, 근래 이를 서기전 4세기 후반까지 올려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발생과정 및 초기 발생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 고조선과 연의 요동군과의 경계였던 청천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에서의 세형동검 이전 단계의 주요 금속기 유물로는 비파형동검을 들 수 있는데, 출토된 수가 매우 적고 함께 출토된 유물 또한 빈약하다. 출토된 유물에서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앞에서 가정해 본 추론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빈약한 비파형동검 문화단계의 금속기 유물로는,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에 요동 지역에 세력을 뻗쳐 연과 각축을 벌였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이 지역에서 상정하기 어렵다. 비단 유물의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면 요동 지역은 그 변방이므로, 적어도 몇몇 유물의 양식상,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서북한 지역의 것이 구식이고 그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신식인 유물이 요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비파형동검 등 금속기 유물양식은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청천강이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동검을 특징적인 유물로 하는 금속기 문명을 영위했던 서북한 지역의 정치세력은 B.C. 3세기 초 이후에 성립된 것이 된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고조선이 그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동 지역을 포괄했던 고조선은 중심지가 평양이 아니었던 것이 된다. 이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일단 세형동검의 원류인 비파형동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남만주 요령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토기 양식에서도 대체로 요하선을 경계로 미송리식 토기와 변형 미송리식 토기는 요하 이동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삼족기(三足器)는 요서지역에서는 풍부하게 출토되나 요동지역에서는 소수만 확인된다. 무덤양식에서도 고인돌무덤이 요동지역에서만 보고되고 있어 참고가 된다. 문헌상으로 볼 때도 앞에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한편 비파형동검 문화기 때에 요서 지역에서 활약했던 족속은 산융(山戎)과 동호(東胡)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정을 좀더 진전시켜 보면, 서기전 3세기 초 고조선과 연과의 첫 충돌 당시 연군의 진출선이었던 만번한(滿潘汗), 즉 오늘날의 해성현(海成縣) 서남쪽과 개현(蓋縣)을 잇는 일대 지역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요하 하류 동편에 중심지를 두었던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심양시의 정가와자 구역에서 서기전 6∼5세기 무렵의 무덤떼가 발굴되어, 그 중 비파형동검과 동경 등을 위시한 청동기와 가죽제품 및 구슬 등 부장품이 풍부하게 출토된 큰 무덤이 있는가 하면 같은 구역 내의 무덤 중 부장품이 거의 없는 작은 것들도 있어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즉 사회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정치적으로 우세한 집단이 성장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기전 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고조선은 서쪽의 연과 대립하게 되었다. 연후(燕侯)가 ‘왕’이라고 칭하며 동으로 팽창할 기세를 보이자, 고조선의 군장(君長)도 왕이라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양국간의 대립은 고조선측이 사절을 보내 외교적 절충을 벌여 일단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어 서기전 3세기 초 연의 국세가 강성해져, 남으로 제(齊)를 공략하고, 북으로 동호(東湖)를 정벌하고, 이어 고조선에 대한 침공을 해왔다. 양국간의 전쟁에서 고조선이 패배해 영토를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 고조선은 중심부를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뒤, 고조선은 성능이 개선된 세형동검과 청동창 등을 만들고 철제공구와 무기도 사용해 금속기문명을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 무덤과 출토 유물은 이전 시기 이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팽이형토기 유적에서 보이던 매장 풍속의 전통이 강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심지 이동 후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토착주민과 공고히 결합해 나갔음을 뜻한다. 2. 철기의 사용 B.C 4세기에 한족과 흉노족의 활발한 움직임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는 두 계통의 새로운 금속문화가 전해졌다. 하나는 한족의 철기문화이며, 또 하나는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문화였다. 이 두 문화는 만주에서 혼합되어 압록강 중류와 청천강 상류를 거쳐 대동강유역으로 들어 왔다. 그리하여 대동강 유역은 새로운 금속문화의 저수지가 되었으며 이 저수지로부터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철기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기술의 발전은 다른 부분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토기의 출현,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이 가속화되어 최초의 국가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철기의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중국제 철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서기전 4∼3세기에 해당하는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서북지방에 걸쳐서 출토되고 있다. 명도전은 연나라의 동폐(銅幣)로서 표면에 ‘明’자가 양주(陽鑄)되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것들은 철기를 사용하던 연나라 영역에 살던 주민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최초로 철기가 들어온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철기는 주조로 된 농기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무기는 여전히 청동제를 사용하였다. 중국에 있어서도 이 시기에는 단조철기(鍛造鐵器)가 보급되지 못하였고, 주조철기(鑄造鐵器)만이 일반화되어 있던 것과 같은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 있어서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표지로 한 청동제 무기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세형동검을 사용하는 곳에 주철제(鑄鐵製) 농공구가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청동기와 철기를 병용한 시대를 한국고고학에서는 ‘초기철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둘째 단계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낙랑군(樂浪郡)의 설치는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철기는 우리 나라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즉 도끼·가래·낫 등 철제 농경구와 단검·창·꺽창을 비롯한 무기류가 전국적으로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주 일원에는 철을 채취하던 원시 용광로 유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이 시대에 철생산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서력서기후 3세기경 영남 일대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樂浪)·대방(帶方) 2군, 왜(倭)와 철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철기생산의 전국적인 확산은 한나라의 세력에 밀려난 위씨조선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철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된 시대를 전대의 초기철기시대와 대응되게 후기철기시대라 해랴 할 것이나, 한국고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초기라는 의미에서 ‘원삼국시대’로 부르고 있다.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북부지역, 중부지역, 남부지역 등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북부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은 평북 위원 용연동, 영변 세죽리, 함북 회령 오동 유적 등이다. 세죽리 유적은 신석기시대층, 청동기시대층, 철기시대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시대층은 가장 윗층으로 집자리는 모두 지상가옥이다. 집자리에서 명도전, 포전(布錢) 등의 화폐와 승석문토기 및 철기 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무덤에는 토광묘, 조개무덤, 옹관묘 등이 있다. 유물로는 철기, 청동기, 토기 등이 있다. 그 중 철기로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칼, 도끼, 자귀 등이 있다. 토기에는 회색의 승석문토기가 있다. 연대는 서기전 3∼2세기로 보고 있다. 회령 오동 유적에서는 제6호 주거지에서 주조철부가 출토되었다. 북한학자들은 서기전 6∼4세기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무산 호곡동 유적에서는 철기시대의 주거지들이 조사되어 1기에서 6기로 나누어진다. 그 중 5기와 6기에 속하는 주거지가 철기시대에 속하며 다수의 철기를 포함하고 있다. 5기를 서기전 7∼5세기로, 6기를 서기전 3세기로 편년하고 있다. 그러나 5기에 속하는 주거지에서 주조철부가 출토되고 있어 이를 서기전 3세기경으로 낮추어 볼 수도 있다. 북부지역의 철기문화는 세형동검이나 토광묘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토광묘는 북한에서 움무덤(토광목관묘), 나무곽무덤(토광목곽묘), 귀틀무덤(대형석실분, 목실분)으로 구분하고 있다. 토광묘의 서기는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단장의 토광목곽묘가 은대(殷代)로부터 동주시대(東周時代)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토광묘가 북방계 청동기문화권에 들어와 처음 축조된 것은 요령성(遼寧省) 금서현(錦西縣) 오금당(烏金塘) 토광묘이다. 여기에서는 요령식동검과 진과(秦戈)가 함께 출토되어 그 시기를 춘추 전기(春秋前期)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토광목곽묘은 심양(瀋陽, 現 沈陽)의 정가와자(鄭家窪子) 유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인골과 함께 많은 청동기와 토기가 발견되었다. 연대는 춘추 말~전국 초인 서기전 5∼6세기로 보았다. 대동강유역에서 가장 이른 토광묘 유적은 재령군 고산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변형 요령식동검과 도씨검(桃氏劍) 2자루가 발견되었다. 연대는 전국 말에 해당하는 서기전 4∼3세기로 보고 있다. 그 다음에는 강서 태성리 유적이 있다. 이 곳의 토광목곽묘에서는 세형동검과 동모, 철부, 철단검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서기전 2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에서 움무덤을 서기전 5세기에서 2세기 중엽으로, 나무곽무덤을 서기전 2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광묘는 세형동검이 유행하던 시기에 서북한지역으로 전래되었으며, 뒤 이어 철기가 혼입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의 유물에는 세형동검, 세문경, 동모 등의 청동기, 쇠단검, 쇠농공구, 쇠뇌 등의 철기,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 배부른 단지 등의 토기가 있다. 그 밖에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으로서 청동기와 철기가 공반되는 유적에는 서흥 천곡리 석관묘, 황해도 송산 솔뫼골 위석묘, 함흥시 이화동 토광묘 등이 있다. 다만,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인 서흥 천곡리 석관묘의 경우, 석관묘에서 출토된 검파두식을 철광석제로 보고 있어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북부지역에서 철기문화의 시작은 토광묘의 유입 및 세형동검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체로 세형동검이 만들어진 후 토광묘가 유입되면서 철기가 등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처음 철기가 유입되는 시기에는 승석문 등 타날문이 있는 토기에 앞서서, 서북지역에서는 미송리형토기, 묵방리식토기, 우각형파수부토기 등이, 동북지역에서는 꼭지손잡이토기, 우각형파수부토기, 흑도 등 무문토기계통 토기가 사용되었다.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이곡리 유적과 춘천 중도 유적을 들 수 있다. 마장리 유적은 미군장교에 의해 조사된 후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이 유적은 서기전 2세기경부터 서력서기 전후에 걸친 유적으로 보았다. 춘천 중도 유적은 주거지와 적석총 등이 조사되었다. 제1·2호 주거지의 연대를 북창 대평리 유적과 비교해 1∼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이 외에도 조사된 유적으로 경기도 수원 서둔동 유적, 강원도 횡성 둔내 유적, 양양 가평리 유적, 충청북도 중원 지동 유적, 하천리 유적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조사된 강원도 명주 안인리 유적에서는 呂자형 주거지와 凸자형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유물은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주거지 유적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반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청동기시대를 잇는 철기시대 초기 유적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다. 이 시기의 무덤에는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적석총(積石塚), 즙석분(葺石墳) 등이 있다. 토광묘는 가락동 유적에서 처음 알려졌다. 가락동 유적은 1호분이 토광목관묘이고, 제2호분은 즙석봉토분으로 목관묘와 옹관묘가 합장된 형식이다. 이 즙석봉토분은 한강유역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된 형식이다. 석촌동 3호분 동쪽에서도 즙석봉토분, 토광묘, 옹관묘 등 여러 기가 조사되었으나 그 연대를 모두 3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최근에 조사된 진천 송두리 유적은 2기의 토광목곽묘로부터 중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남부지역에서 보이는 소위 와질토기계통의 쌍이부원저호 및 주머니호 등이 철부, 철낫, 청동기 등과 함께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는 다수의 토광목관묘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연질단경호와 심발형토기, 청동제 마형대구(馬形帶鉤) 11점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안성에서도 연질계 토기가 청동제 마형대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와질계 토기는 낙동강유역과는 다르게 원삼국시대 초기가 아닌 2∼3세기경의 토광묘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와질계 토기의 중심지인 낙동강유역에서부터 파급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옹관묘는 가락동 2호분과 같이 토광묘와 합장으로 발견되거나, 단독묘일 경우에도 적석총과 같은 다른 묘제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대는 3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적석총은 양평 문호리, 춘천 중도, 제원 양평리, 제원 도화리 등 한강 상·중류에서 2∼3세기경에 해당되는 무기단식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4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울 석촌동 부근에서 기단식적석총으로 발전된다.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대체로 4기로 구분된다. Ⅰ기는 청동기사회에 철기유물이 유입되는 단계로 연대는 서기전 2세기경이다. Ⅱ기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나 여전히 청동기나 경질무문토기가 사용되며, 무덤으로 목관묘와 옹관묘가 있던 시기이다. 경질무문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와 같은 계통이나 경도가 높아지고 기형이 다양한 토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연대는 서기전 2세기 말 또는 서기전 1세기 초반에서 서기 1세기 전반까지로 설정된다. Ⅲ기는 완전히 철기문화에 접어든 단계로 타날문토기, 회백색연질토기(와질토기)가 사용되며 철기류와 장신구류가 많아지며, 무덤으로는 여전히 목관묘(木棺墓)가 사용된다. 이 시기의 연대는 1세기 중엽에서 2세기 전반까지로 설정된다. 철기에는 철도끼·철창·철검·철촉 등의 무기류와 철낫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그 중에서도 주목할 것은 철도끼이다. 도끼 중에는 실제로 사용한 것도 있으나, 태반의 도끼들이 길이가 필요 이상으로 길고 납작해 실용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들이다. 이러한 대형 철도끼들은, 후에 신라고분에서 다량 출토되는 철정(鐵鋌 : 地金으로 사용됨.)과 유사하다. 이러한 대형 철도끼형 철기들은 교역의 매체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철의 생산이 자체 수요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타날문토기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워낸 무문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는 물레로 성형(成形)해 등요(登窯)에서 구워낸 것이다. 기벽을 강화하기 위해 박자(拍子)로 기벽을 때린 타날문(打捺文)이 있는 토기를 말한다. 그리고 소성도(燒成度)가 낮아서 흡수성이 있고 개와(蓋瓦)와 비슷한 연질의 토기이기 때문에 소위 와질토기(회백색연질토기)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토기들은 물레로 빚었기 때문에 토기의 벽이 얇고 표면이 고르며 기종도 다양하다. Ⅳ기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는 단계로 목곽묘(木槨墓)가 등장하고, 철기의 출토량이 많아진다. 목곽묘에서는 무기류가 증가하며, 패총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가 등장한다. 이 시기는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3세기 후반경 이후로 고총고분(高塚古墳)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남부지역 철기문화의 형성과정은 전 지역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보기 보다는 최소한 두 계열에 의해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남부지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 토광묘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대동강류역으로부터 육로(陸路)를 이용해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토광묘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의 전한(前漢)대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가상부귀경(家常富貴鏡) 등 거울 등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패총 및 옹관묘의 문화는 해로(海路)를 통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패총에서 화천(貨泉), 오수천(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복골(卜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계열의 문화는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두 문화가 접합되는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두 계열이 어느 정도 공존했음이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남부지방 철기문화의 초기단계에서의 성격문제는 낙랑(樂浪)의 등장과 관련시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이전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을 전후하는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남한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의 철기는 주조철부 등으로 있고, 낙랑과 직접 관련되는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종래 철기문화의 형성은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철기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벗어나 남부지역의 철기문화가 밖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문화와 기존의 토착문화가 융합되어 새롭게 생성되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즉, 철기가 유입되는 시기에도 여전히 석기나 청동기가 사용된 점, 청동기가 소멸된 후에도 무문토기의 계열인 경질무문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가 계속적으로 사용된 점, 특히 철기 중에서 초기에는 청동기를 모방한 유물이 많은 점 등이다. 다만, 철기의 제작기술은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외래적인 문화요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에 이어 변화·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철기시대는 역사적으로 보아 북부지역에서는 고조선(古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이어 고구려(高句麗)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남부지역에서는 삼한(三韓)이 자리잡았던 시기이다. 서울지역, 경주지역, 김해지역에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중심 세력이 형성되면서 각각 백제, 신라 및 가야 등으로 발전되어나갔다. 3. 위민조선 고조선(古朝鮮)은 B.C 4세기 말에 요동으로 침입하는 연의 세력에 밀리면서부터 점점 쇠약해져 갔다. 연의 침략은 진개에 의하여 크게 진전되었는데 그는 요동지방을 침탈하고 여기에 요동군을 설치하게 하였다. 요동군은 연에 이어 진의 지배하에 들어 가지만 그동안 중국인의 관리 군대 상인등 내왕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진은 중국을 통일한 지 불과 10여년만에 망하고 한이 이를 대신하였다 이때 한은 노관(盧琯)을 옛 연의 땅에 연왕(燕王)으로 보하였는데 연왕(燕王) 노관(盧琯)이 한(漢)나라에 반(叛)하다 실패하여 흉노로 도망하자 그 밑에 있던 위만은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상하장(上下障)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당시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시대로, 위만은 준왕으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는 직함을 받았다. 그런데 차츰 그는 진번조선(眞番朝鮮)과 연(燕)·제(齊)의 유민들을 모아 왕 노릇을 하다가, 끝내는 준왕을 내몰고 왕검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때가 중국 한나라 혜제(惠帝) 1년(서기전 194)이다. 위만은 중국어와 조선어에 능통하였고 주변 사정에 정통했으며, 주위의 진번 등을 복속시켜 영토의 확장을 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며 정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가계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와 태자 장(長)에 이르게 되며, 손자대인 서기전 108년 한무제(漢武帝)의 침공으로 망하게 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통치 기간은 위만에서 우거에 이르는 3대 87년간이 되는데, 위만조선은 왕권이 세습될 정도로 단단한 국가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의 국가적 기반은 우거왕대에 2년 동안이나 한무제의 원정군과 대치하였던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위만조선이 중국인 유이민에 의한 식민지 정권이었다는 과거의 통념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한 비판의 논거는 첫째 위만이 연인이 아니라 고조선인이었으리라는 점에 있다. 그가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는 것, 국호를 여전히 조선이라고 했다는 것이 위만의 민족적 소속에 대한 근거이다. 둘째 그의 정권에는 고조선인으로서 높은 직위를 차지하는 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위만조선은 비록 철기문명에 친숙한 중국인 유망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중국의 식민지 정권일 수는 없다. 우거왕대에 한무제의 침략을 받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주위의 예(濊)나 변진(弁辰)의 조공로 및 무역로를 차단한 데 있었다. 위만조선은 지리상으로 한나라와 이들 나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군사력만 있다면 무역로에 대한 관리·통제가 가능하였으며, 이는 위만조선에게 상당한 중간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중간 이익에 대한 과욕은 한무제의 원정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위만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간을 잘 싸웠으나 일부 주화파의 내통과 투항이 있었고 그 중의 한사람에 의하여 우거왕은 살해되었다. 그 후 대신 성기가 최후까지 저항을 꾀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왕검성이 함락되어 위만조선은 멸망하였다. 상하장을 근거로 하여 유민 집단과 망명인들을 통솔하고,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나간 위만조선은 그 성격상 정복국가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정복국가로 출발한 위만조선은 호전성을 띠었고 조공로·무역로의 차단도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만조선이 정복국가였다는 사실은 ≪후한서≫ 동이전 예조(濊條)에 실린 “원삭(元朔) 1년(서기전 128)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데리고 요동으로 갔다.”는 기사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수록된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 반하여 2,000여 호의 백성을 데리고 진국(辰國)으로 망명하였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지배 계층과 토착 세력 간에는 알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와 같은 기록들이 이를 방증하여 준다.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最)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왕의 신분이 세습된 것과 마찬가지로 상류층 내에서는 신분의 세습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위만조선에는 적어도 지배층인 상류층과 피지배층인 평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계층이 존재하였으며, 신분제도는 적어도 상류층·평민과 노예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역계경·남려 등의 관련 기사를 통해 볼 때 당시 위만조선의 인구는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역계경·남려 등은 위만조선을 이루는 부족의 장이자 행정 관료로, 그 밑에 상당한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5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지닌 고조선 사회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을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법령체계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팔조금법 八條禁法〉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 낙랑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60여 조로 늘어났고 〈낙랑계령 樂浪契令〉도 제정되었다 한다. 조선군에 의한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衛) 섭하(涉何)의 피살, 왕검성을 중심으로 한나라 무제의 원정군에 2년 동안이나 저항하였던 사실, 그리고 위만조선의 멸망이 단지 군사력의 약세 때문이 아니라 내분에 의한 것이었다는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당시 조선의 군사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만조선의 실연대는 서기전 194년에서 서기전 108년까지이므로 대개 청천강 이남의 서북 지방에서 나타나는 세형동검 관계 유물·유적들을 위만조선의 흔적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관련 묘제로는 돌무덤·움무덤과 독무덤을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위만조선은 장거리 무역, 인구의 증가와 이에 따른 토지의 확장과 확보, 무력을 통한 인근 부족의 정복, 철제 무기의 사용과 이를 위한 제반 전문 장인의 존재, 말의 사육에 필요한 마장(馬場)과 조련사의 확보, 잉여 식량의 확보, 율령 조직, 조공로·무역로의 통제에 따른 중간 이익,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징병 제도, 조세 등 일련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상호연관을 맺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위만조선은 직업적인 계층의 중앙 관료들로 구성된 정부를 갖추고 있었으며,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정의에 부합될 수 있을 만하다. 그러나 당시에 사용된 문자와 언어, 그리고 위만조선을 대표할 예술양식 등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아마도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따금 출토되는 중국의 명도전(明刀錢)이나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은 위만조선과 중국과의 교역관계뿐만 아니라 문자사용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4. 한의 군현(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옮겼습니다)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굴복시키고 점령지역의 통치를 위해 4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이것이 한사군이다. 이 4군은 명칭은 물론, 지역·치폐경위·소멸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변천과정을 겪었다. 4군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변화되고 있다. 서기전 82년에는 진번군을 낙랑군에 합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폐합되었다. 서기전 75년에는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현도군의 치소(治所)가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노성(老城)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전에 현도군에 합쳤던 임둔군의 옛땅은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현도군의 처음 영토는 토착민에게 돌아갔으며 통치방식도 자치에 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처음에 설치된 4군 중 진번과 임둔 2군은 설치된 지 25년 만에 소멸되었고, 현도군도 20여 년만에 본래의 지역이 토착세력에게 점령되어 한사군은 불과 30여 년만에 낙랑군만을 남기고 소멸되는 변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 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와 같이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군이 한사군이라고 하는 역사술어로 사용된 것은 일제의 관학사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영구화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였다. 그 근거가 되는 역사사실의 하나가 바로 한사군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조선의 역사는 자율적인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침입과 이에 따른 영향으로 진행되는 타율적인 역사이며, 따라서 선진문물을 보유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나라의 식민지로 설치된 한사군의 존재는 타율성을 입증하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한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한사군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구나 한나라가 멸망(220)한 뒤의 시기는 한나라와 전혀 무관한 지역이다. 따라서 낙랑군의 성격은 통치기구라기보다는 중국대륙의 무역·통신업무 등을 수행하는 상업적인 기능이 강한 조계지(租界地)와 비슷한 기관임도 밝혀졌다. 낙랑계 고분이 평양 근처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고고학적 보고도 그와 같은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한사군은 일제에 의해 그 실체보다도 확대 해석되어 지금까지도 한국고대사의 인식을 그르치게 하는데 영향을 끼쳐왔고, 광복 후에야 비로소 그 바른 모습이 밝혀졌다.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의 어떤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사술어로서도 타당성이 결여된 비과학적인 용어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