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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기의 사용

한국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시대로부터 금석병용기를 거쳐 초기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이 일제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8·15해방 이후 왕성한 발굴조사와 연구성과로 청동기문화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청동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는 대체로 B.C 9세기 ~ 8세기쯤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더 올려 보거나 혹은 내려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문화권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청동기시대는 대개 B.C 4세기경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

민무늬토기와 간석기를 중심으로 이룩된 문화를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라고 하는데, 이것은 앞시기인 신석기시대를 가리키는 빗살무늬토기문화와 구분되며 넓은 뜻으로는 청동기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 청동기인과 신석기인과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빗살무늬토기 유적과 민무늬토기 유적은 근접해 있다 하더라도 서로 뚜렷이 구별이 되고 있다. 이는 양자가 다른 생활조건에서 살았으며, 종족상으로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빗살무늬토기의 유적이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새로운 청동기인이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청동기 분포지역은 대체로 동검을 기준으로 문화권을 나누고 있다. 이 구분에 의하면 비파형동검이 많이 나오는 랴오닝[遼寧]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예맥문화권(濊貊文化圈)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고조선 영역으로 보고 한국 청동기문화에 넣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범위는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라도 그것이 사용되기 시작한 때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청동기가 나오는 많은 유적들이 대부분 후기에 속하면서 철기와 함께 출토되므로 청동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와 겹친다.

랴오닝 지방에 있는 우가촌(于家村) 유적의 위층에서 발견된 청동단추·청동날개촉·청동낚싯바늘 등은 의주 신암리유적의 위층에서 나온 청동유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청동기문화의 기원에 관해 시사하는 바 크다. 이러한 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는 중국 문화(商文化)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청동기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아연이 섞여 있는 점으로 보아 중국과는 다르고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동칼의 자루머리에 동물 모양의 무늬가 장식된 점, 꼭지달린 단추 모양 장식, 안으로 굽은 청동손칼 등 청동기의 모양과 무늬에서도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청동기인의 생활

청동기시대에 생업은 대체로 농경생활을 주로 하면서 물고기잡이와 짐승사냥·열매따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탄화된 쌀을 비롯하여 기장·수수·조·보리 등의 곡식과 곡물의 이삭을 따는 데 쓴 반달돌칼·돌낫 및 수확된 곡물을 가공하는 데 이용한 갈판 등의 유물이 나오는 것을 보아 농경이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농경무늬청동기[農耕紋靑銅器]에는 따비로 밭을 일구는 사람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거의 대부분 강을 따라 벌어진 평야를 앞에 둔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대에는 논농사보다 밭농사 위주로 농경이 꾸려진 것 같다. 수확에 쓰인 반달돌칼이나 돌낫은 우리나라 전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현재까지 찾아진 이 시기의 곡식을 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잡곡농사가 전보다 활발해졌고 벼농사도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장·수수·콩·팥·조·보리 등의 잡곡은 평양 남경과 회령 오동, 무산 범의구석, 송림 석탄리와 여주 흔암리유적에서 나왔는데, 남경과 흔암리유적에서는 여러 가지의 잡곡이 함께 출토되어 주목된다. 또한 남경유적을 비롯하여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에서 탄화된 쌀이 나왔고 부여 소산리·번곡리, 광주 궁뜰, 산청 강루리 등 여러 곳에서는 토기의 바닥에 나 있는 볍씨자국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대부분 강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드물게 보령 교성리유적처럼 바닷가 산 정상부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집들이 한 곳에 10~100여 채까지 발견되고 있는데, 송림 석탄리유적에서는 약 10만㎡의 범위에서 100여 채가 넘는 집터가 발굴되었다. 무산 호곡동에서는 1,200㎡ 범위에 몇 겹으로 서로 겹쳐 있는 상태로 50여 채의 집터가 나타나 큰 마을을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같은 곳에서 살았음을 알게 해준다. 집터 평면은 송국리, 흔암리, 서산 해미유적에서처럼 둥근꼴도 있으나 거의 네모꼴이나 긴네모꼴이며, 움집을 이루고 있다. 크기는 한쪽 길이가 4~7m인 것이 많지만, 파주 옥석리유적에서는 3.7×15.7m나 되어 보기 드물게 긴 것도 있다. 이렇게 큰 집은 대가족이 공동으로 살던 집이거나 연모를 제작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집터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 팠던 기둥구멍과 화덕자리,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은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화덕은 대부분의 집터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돌을 돌려 만들거나 흙으로 쌓은 것도 있다. 바닥은 맨 땅을 다진 것도 있지만 찰흙을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것이 많으며, 남경유적에서는 갈대를 엮어 깔았던 흔적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크게 석기·토기·청동기로 나누어진다. 석기는 간석기가 대부분이며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만든 수법도 매우 뛰어났다. 쓰임새에 따라서 공구용·농경용·사냥용으로 나누어진다. 공구용으로는 돌도끼와 홈자귀가 있다. 돌도끼는 날이 양쪽에서 갈라진 조개날에 몸통의 단면이 네모난 것, 볼록 렌즈 모양, 긴네모꼴 등이 있는데, 조개날도끼는 주로 나무를 자르는 데 이용되었다. 홈자귀는 나무를 다듬거나 구멍을 뚫는 데 사용한 연모이다. 농경용 연모에는 반달돌칼·돌괭이·갈돌 등이 있다.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데 쓴 연모로 끈을 꿰어 손에 잡아맬 수 있도록 2개의 구멍이 나 있으며, 지역에 따라 세모꼴·긴네모꼴 등으로 생김새에 차이가 있다. 사냥용 무기인 화살촉은 슴베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무기에 속하는 간돌검은 처음에는 실용적으로 쓰이다가 뒤에 손잡이에 단(段)이 생기는 등 의기(儀器)의 기능을 지니게 되었던 것 같다.

토기는 흔히 민무늬토기라고 일컬어지지만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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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간토기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 다르게 무늬가 없으면서 대부분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낮은 온도에서 구워졌기 때문에 흡수성이 강하다. 비짐에는 굵은 모래알이 많이 섞여 있고 바닥은 거의 납작밑이다. 생김새에 따라 팽이형토기·구멍무늬토기·화분토기·가지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로 분류된다. 팽이형토기는 적갈색이나 흑회색을 띠며, 서북지역의 고인돌·집터에서 많이 나온다. 구멍무늬토기는 입술 가까이에 구멍이나 굼이 있는 토기이며, 가지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는 무늬나 색을 넣은 다음 토기의 겉면을 곱게 간 것으로 특수한 목적에 쓰인 토기이다.

청동기는 처음에는 청동단추나 청동손칼처럼 크기가 작은 것들을 만들어 쓰다가 비파형동검, 부채꼴 청동도끼 등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한국식동검·청동투겁창·청동꺽창·거친무늬거울 등을 만들었다. 비파형동검은 주로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나오는데 다른 청동기보다 구리가 많이 섞여 있으며, 몸통에 있는 돌기의 위치와 아랫부분 곡선의 팽창 정도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분류된다. 청동도끼는 날부분이 부채꼴이고 머리 쪽에 수평으로 자루를 끼우는 자루투겁이 있는데 여기에 무늬를 새겼다. 한국식동검은 비파형동검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검인데 몸통의 허리가 팬 점, 등대의 가로마디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무덤으로는 고인돌무덤을 비롯하여 돌널무덤·돌무지무덤·돌깐무덤이 있으며, 늦은 시기가 되면 독무덤·널무덤도 나타난다. 고인돌은 주변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이 있으며, 덮개돌과 굄돌에 따라 탁자식·바둑판식·구덩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무덤의 껴묻거리는 거의 민무늬토기와 간돌검·화살촉 등으로 무덤의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 편에서 가끔 붉은간토기나 청동기가 나오기도 한다. 돌널무덤은 넓적한 판돌을 가지고 벽·바닥·뚜껑을 짜맞춘 것으로 대부분 서해안지역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찾아지며 동검을 비롯한 많은 청동기가 껴묻기되어 있다. 돌깐무덤은 무덤방의 언저리에 돌을 깔아서 묘역을 이룬 것으로 많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3.군장국가의 성립

한국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국가 형태로, 종래 역사학계에서는 고대국가의 초기 형태를 일반적으로 부족국가(部族國家)라고 호칭하였으나, 그 개념이 다소 모호하기 때문에 1970년대 초부터 천관우(千寬宇)·이기백(李基白) 등이 이를 성읍국가로 고쳐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이후 이 용어는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아 학계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읍국가설의 근거는 서양학계의 경우 고대국가의 초기 형태를 주로 지연적(地緣的) 구조에 입각하여 도시국가 혹은 성채국가(城砦國家)로 호칭하고 있으며, 실제로 한국 고대의 경우에도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된 건국 초기의 국가 형태에 대한 설명 중 도읍에 성곽을 쌓은 사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는 초기에 주변의 여러 정치 세력들을 정복, 병합해 가는 가운데 국가의 기틀을 확립해 갔는데, 이 때 일단 정복된 정치세력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설명을 빌려 국가의 초기 형태를 성읍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으로 본다.

더욱이 성읍국가라는 용어는 세계학계의 도시국가 혹은 성채국가를 연상시키므로, 한국사를 세계사와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담당하기도 한다. 성읍국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 개 성읍국가가 느슨한 형태로 뭉쳐 있는 국가단계를 영역국가(領域國家 또는 領土國家) 혹은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성읍국가 대신에 이를 군장국가(君長國家)로 통일한 바 있다.

고인돌은 고대국가 발생 이전의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족장사회 상류층의 공동묘지이다. 나주 판촌리(板村里)에서 나타나는 어린 아이의 무덤은 세습신분제의 사회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고인돌사회=단군조선=청동기시대의 시작=노예순장제사회=한국 최초의 국가성립이란 등식의 견해가 성립 된다.

이들 최초의 군장국가의 정치적 지배자가 다스리는 영토는 그리 넓지 못했을 것이다.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을 쌓고 살면서 성밖의 평야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지배하는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한국 최초의 국가 기원은 군장국가로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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