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일이 참 많다. 문화재청에서 몇 년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1문화재 1지킴이 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에 알았지만 전국에 지킴이들이 5만여명이란다. 모두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곱게 후손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작은 수고를 모우고 있는 분들이다.

제월당편액

담밑으로 흐르는 계류

제월당

제월당

광풍각

편액

초정

광풍각과 연지

 

 

문화재청에서는 이 분들을 위해 올해로 세번째 광주에서 전국대회를 갖고 우수사례발표와 위로를 겸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번 소쇄원답사는 1박2일의 일정가운데 마무리를 겸해서 이루어졌다. 뜻밖의 즐거움이어서 더 반가운 길이었다.

유년기와 소년시절을 웅장한 산 아래에서 자란 나는 산은 높고 깊은 것으로만 알고 자랐다. 그래서 산은 정을 주고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 넉넉한 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열차의 차창으로 바라보이는 호남의 산들은 유년기에 풀피리 만들어 불던 작은 동산처럼 정겨운 산이다. 한때 이 나라에 아득한 절망을 느끼고 원망하면서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차 안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무릎에 올려 놓고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사람들, 이 산과 들, 그리고 옛사람들의 자취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나이든 사람의 공연한 감상은 아니다.

차의 멋은 색, 향, 미가 어우러져야 한다. 계곡에서 솟아 나오는 좋은 물과, 곡우 이전의 계절에 알맞게 자란 차 잎을 따서 정성 들여 만들어 낸 차라야만 색향미의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차 달이는 사람의 정성이다. 그러나 그 맛을 느끼는 것은 자로 재듯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차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주관과 맛을 느끼려고 하는 생각이 있을 따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디가 어때서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할 필요가 없이 오랜 생활과 접촉을 통해 알고 느끼는 아름다움만으로 또한 나만의 비밀스런 감정으로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 있다. 나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 볼 때는 차를 마시듯 음미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세 번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지은 적이 있다. 처음은 아이들이 어릴 때 방 한 칸만 들여서 농막처럼 단촐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아이들이 조금 자란 뒤 넓은 대나무 밭을 사들여서 안마당과 텃밭이 있는 삼 칸 집을 제법 추녀도 모양새 있게 만들었었다. 그 집 앞에는 큰 냇물이 흘러 여름에는 온 가족이 멱을 감기에 충분하였다.

세 번 째는 절반 풍수쯤 되는 친구와 함께 좋은 집터를 찾으려고 달포 넘게 이곳 저곳을 많이 살피고 다녔다. 뒷산이 날카로우면 사람의 심성이 메마르므로 산 모양이 둥글고 너그러워야 하고 큰물이 넘치는 계곡이 있으면 산사태가 날 염려가 있으므로 그런 곳은 피하고, 집은 남향으로 지어야 겨울에 볕이 잘 들고 여름에 시원하므로 그런 집터에 앞에는 계곡물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흐르는 곳을 찾으려 했다.

또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면 이웃이 순후한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구가 좁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툭 트인 들판을 만나고 계곡이 깊어 이십여리쯤 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남향으로 ㄱ자형 집을 지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담 너머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허리께 정도로 돌담을 두르고 대문은 만들지 않았다. 뒷산에서 졸졸 흐르는 물을 모아 마당 한쪽에 작은 연못을 만들고 마당에는 꽃나무를 사철을 안배하여 심었다. 대청에서도 달을 볼 수 있도록 ㄱ자형의 튀어 나온 부분은 동쪽과 남쪽 벽 전체를 유리창으로 만들었다.

여름에는 대문간만 나서면 지척에서 계곡물이 흘러 비라도 많이 내리면 안방에서도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고, 조용히 눈 내리는 겨울 밤에는 눈을 못 이겨 작은 나뭇가지 툭툭 부러지는 소리가 상쾌하다. 그 집에 살 때는 일주일에 3일은 자고 가는 손님을 치렀지 싶다. 아내와 아이들은 지금도 그 집을 그리워한다.

소쇄원 동구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계류를 보면서 옛집이 생각났다.

서두에 적었듯이 소쇄원을 대하면서 분석하는 눈길로 바라보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집이 지어진 동기가 어떠하든지, 누가 지었던지, 정원이라 부르던지 원림이라 부르던지 이러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자연과 조화되어 인간이 더불어 살던 곳이고, 어울림의 미학을 바라 볼 수만 있으면 족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선비들은 자연을 벗삼아 놀기를 좋아했다. 맑고 소쇄한 풍경을 찾아 떠돌기를 즐겨 했고, 풍광이 특별히 빼어난 곳에는 자연을 벗삼을 수 있게 멋들어진 정자를 하나 지어 놓았다. 글공부에 지치고, 일에 심신이 피로하면 정자에 머물며 머리를 식혔다. 봄날에는 꽃놀이를 즐기며 주작을 나누었고, 여름날이면 계곡에 발을 담그고 탁족(濯足)을 즐겼다. 가을이면 무심히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계곡 위를 거슬러 가는 달을 보며 기개와 결기를 키웠다. 정자는 칩거와 은둔을 즐기던 선비들의 우수, 시와 문을 주고받으며 벗과 노닐던 풍류가 베어 있다. 우리가 정자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광풍각과 제월당은 그러한 문학의 산실이요 삶의 터전인 것이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은둔생활을 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원(別墅園)이다.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이다.

북쪽 장원봉(壯元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五曲)으로 흐르는 계류를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터를 잡아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齊月堂), 초정(草亭), 화계(花階), 연지(蓮池), 석천(石泉) 등이 배치되어 있다. 계류 위에는 외나무다리와 죽교(竹橋)가 설치되고 아름다운 토담이 둘러쳐져 있다. 담벽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소쇄처사양공지허(瀟灑處士梁公之虛)」의 글씨가 석판(石板)과 목판(木板)에 새겨져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의 입구는 울창한 죽림(竹林)으로 외부와 막혀 있으며 원내에는 죽(竹) 매(梅) 송(松) 행(杏) 괴(槐) 도(桃) 벽오동 유(柳) 자미(紫薇) 단풍(丹楓) 사계화(四季花) 치자(梔子) 국(菊) 부용(芙蓉) 순채 파초(芭蕉)를 심었던 것이다. 지금도 소나무와 느티나무 배롱나무가 계류와 정자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쇄원의 조경을 바라보면 새삼스럽게 교만하거나 거슬리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려는 열린 의지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담장 아래로 계류가 흐르도록 안배한 슬기로움이 그러하다. 이런 조경의 묘는 우리 건축 문화재의 여러군데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남원 실상사의 수철화상능가보월탑 아래 연못에서 흐르는 물을 담장 아래로 흐르게 한 구성과,  대전 남간정사의 마루 아래로 샘물이 흐르도록 조경을 하고 그 물이 연못을 이루어 건물과 연못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 그리고 의성의 고운사 가운루는 아예 계류위에 누각을 세웠다. 나는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대하면 그저 즐겁다.

소쇄원의 풍광을 머리 속에만 그려 넣는 것은 어려운 터라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분이 다가와 내 가슴에 메달려 있는 이름표를 들여다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신다.

바로 소쇄원의 주인이시다. 같은 성씨이니 의례히 항렬을 맞추어 보았다. 같은 항렬에 나 보다 연세가 많으시니 형님이다. “어떻게 부를까요” 하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하신다. 이 또한 동족간에 가질 수 있는 친밀함이다.

지금은 없어진 옛 건물터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여기는 작은 아들이 살았던 집터이고 저곳은 관덕사가 있던 터였다고 상실의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쇄원의 역사를 말씀해 주신다.

입구에까지 배웅을 해 주시며 “다음에는 가족들하고 함께 와서 하룻밤 묵고 가” 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표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봐도 소쇄원에서 하룻밤 잠잘 곳은 없다. 제월당에서 별빛 바라보며 대청에서 자야지 별 다른 도리는 없지 싶다.

200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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