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봉정사를 뒤로하고 버스는 하회마을을 바라고 달린다. 약간 굵어진 빗방울로 윈도우 브러쉬가 부지런히 차창의 빗물을 닦아 낸다. 문화유산해설사는 바쁜 우리 일정을 이해하신 듯, 시간을 절약하자고 달리는 차 안에서 열심히 하회마을과 서애 유성룡선생과 징비록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신다.

안동 외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이윽고 툭 트인 벌판을 만난다. 바로 이 벌판이 풍산들이다. 안동사람들은 특별히 발달한 산업이 없어서 거의 농업에 종사한다. 전통적인 미맥 위주의 농업구조이면서 특용작물로 참깨,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인근 고을인 상주는 요즘 들어 낙농이 조금씩 번창해 가는 반면 안동은 한우를 사육하고 있다.

큰들 주변에는 쌀 농사를 짓지만 산지에 가까운 곳은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안동지역은 기후와 토질이 대마재배에 적합하여 전국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알다시피 대마는 안동포짜기의 재료이다. 그러한 연유로 임하면(臨河面) 금소리(琴昭里) 563번지에 거주하는 배분령(裵粉令:1906~)할머니가 안동포짜기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한국의 전통적인 대마포 직조기능의 맥을 잇고 있다.

안동포는 안동지방에서 제작된 대마포로 영포 중에서도 으뜸으로 쳐주는 생냉이 길쌈이다.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부터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전하며,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유품에도 뛰어난 기술로 직조된 마직물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지방특산물로 지정되어 궁중에 진상되었다고 한다.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면 이번 답사는 유쾌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다행히 봄비처럼 보슬보슬 곱게 내리는 비가 답사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옛터의 고즈녁함은 이런 날에 느껴 보는 것이 더 감칠 맛이 날 터이니 말이다.

오래 전, 아마 칠팔년 전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내와 함께 대진고속도 하행방향으로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먼 길이어서 아내는 잠이 들었고, 나는 잠든 아내를 바라보며  기발한 궁리를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단속사지를 이 참에 들려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삼신당

역마살이 끼었다고 염려하는 어머니와 한 편이 되어 나의 대책 없는 역마살을 구박하던 아내인지라 함께 답사를 하는 것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소망이었으니 궁여지책을 도모한 것이다.

지리산 단성인터체인지에서 내려서 목화시배지, 남사마을을 거쳐 단속사지에 이를 때까지 아내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혼자 한참 어슬렁거리며 석탑 주위를 돌고 있는데 비로소 잠을 깬 아내의 황당한 표정이란….

단속사가 번성했을 때의 사찰 규모와 한국전쟁때 파르티잔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내는 놀람을 떨쳐 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 어설픈 이야기 보다는 멀리 지리산의 천왕봉을 바라보며 길게 누워 멈춘 옥녀봉(玉女峯)아래의 평온한 마을과 그 한가운데 폐허로 변해버린 절터에서 풍겨나오는 그윽함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 이후로 아내와 함께 영주 부석사 여주 영릉 등등 둘러 볼 수 있었다. 보고 싶어 하고 친하고자 하면 항상 그 자리에서 내밀한 언어로 우리를 맞아 주는, 우리의 문화유산은 그런 것이다.

오늘 우리가 찾아온 하회(河回)마을은 풍산유씨(豊山柳氏) 동족부락(同族部落)이며 낙동강의 줄기가 S자모양으로 회류(回流)하는 특수한 경개(景槪)로도 유명하다.

이중환선생의 택리지에

“우리나라 지세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강은 산골에서 나와서 유유하고 한가한 모양이 없고, 항상 거꾸로 말려들고 급하게 쏟아지는 형세이다. 그러므로 강을 임하여 정자를 지은 것은 지세의 변동이 많아 흥하고 스러짐이 일정하지 않다. 오직 시냇가에 사는 것이 평온한 아름다움과 시원스런 운치가 있고, 또 관개와 농사짓는 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사는 것이 강가에 사는 것보다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이 바닷가에 사는 것보다 못하다" 는 말은 옳지 않다.

무릇 시냇가에 살 때는 반드시 고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야 한다. 그러한 다음이라야 평시나 난세나 모두 오랫동안 살기에 알맞다. 시냇가에 살 만한 곳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삼는다. “ 라고 평하였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太極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낙동강(洛東江)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회류(回流)하는 형국(形局)을 지칭한 것인데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동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해발 271m)이 마을 중심부에까지 완만한 줄기를 뻗쳤으며 그 끝은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췄다고 한다. 강의 북안(北岸)에는 부용대(芙蓉臺)의 절애(絶崖)가 병풍과 같이 둘러있어 이러한 산천 지형이 태극형(太極形), 연화부수형설(蓮花浮水形說)을 낳게 하였다. 그래서 큰 인물이 나고 마을이 평온을 유지한다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믿고 있다.

마을 입구의 흰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을 지나 해설사가 처음 안내한 곳이 삼신당이었다.

유년기에 내가 살던 마을의 아랫담에서 웃담으로 마실 가는 고샅길을 닮은 돌담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하회마을의 속살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도착하기 전에, 운수 사납게 상업적인 분위기가 우리를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어렴풋한 염려가 없지 않았던 탓이다.

부용대

남촌의 충효당(忠孝堂)과 남촌택(南村宅),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택(北村宅)은 그 역사와 규모에 있어 서로 쌍벽을 이루는 대규모 이며 전형적인 한옥들이다. 지금까지 보물(寶物)이나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로 지정된 가옥으로는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 충효당(忠孝堂)(보물 제414호), 북촌택(北村宅)(중요민속자료 제84호), 원지정사(遠志精舍)(중요민속자료 제85호), 빈연정사(賓淵精舍)(중요민속자료 제86호), 유시주(柳時柱) 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 옥연정사(玉淵精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謙菴精舍)(중요민속자료 제89호), 남촌택(南村宅)(중요민속자료 제90호), 주일재(主一齋)(중요민속자료 제91호), 하동고택(河東古宅)(중요민속자료 제177호)이 있다. 그래서 전통 한옥의 멋과 아름다움을  보자고 한다면 이곳 만큼 좋은 곳이 없다.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마을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오면 발길은 만송정 솔밭이 보이는 둑길을 걷게 된다.

만송정 숲은 강 북단에 보이는 부용대의 강한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겸암 유운룡선생이 조성했다는 비보의 의미가 있는 숲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함양의 상림 숲이 수해를 막기 위해서 고운 최치원선생이 조성하였다는 것과 동기는 다르지만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해마다 낙동강이 범람하여 물난리를 겪는데도 불구하고 강가에 자리잡은 마을인 하회마을이 수해를 겪지 않고 또 휘돌아 나가는 물이 넘치지도 않는다고 하니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영호남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정자를 살펴 보면 자리 잡은 터나 규모가 전혀 과장됨이 없다.섣불리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큰 바위가 있으면 있는 그대로 주춧돌이나 기둥의 높이로 조절하면 그만이지 건물에 맞추어 바위를 깨어 내는 무례는 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마치 벌이 꿀을 꽃으로부터 얻으면서 꽃을 상하지 않듯이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이 주는 혜택을 겸손히 받아 들이면 그만이었다. 하회마을에서도 새삼 조상들의 자연을 이용하는 슬기에 감탄할 뿐이다. 해서 하회마을은 이곳에 살았던 옛사람들이 유명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빼어난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명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가운데 연인 사이인지 신혼부부인지 알 수는 없으나 커플 티를 입고 있는 한쌍이 있었는데 이 숲길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은 그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시간은 흘러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라고 재촉을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이곳에 찾아와 며칠이라도 머물면서 강 건 옥연정에 올라 낮잠도 한숨 늘어지게 자 보고, 밤에는 강가 백사장에서 파랗게 빛나는 별도 바라 보자. 첫 데이트를 한 아가씨를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하듯이, 더욱이 나처럼 눈썰미가 어설픈 사람은 아쉬움이 많기 마련이다. 다음을 약속하며 채워지지 않은 아쉬운 마음 한 자락을 남겨 두고 차에 올랐다.

[200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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